(오 서희) 어느 날 내가 죽었다. 그것도 무척 억울하게.
사실 나는 이번 생에서 매우 불명예스러운 말년을 보냈으니, 죽어서도 내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다. 그래서 분하다. 나도 억울한 사정 하나는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죽지 않은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내가 엇나가기 시작했던, 혹은 그보다 더 이전의 과거로 ‘정신만’ 돌아왔다. 가만있자. 이거 어쩌면 인생도 바꾸고 이미지도 바꾸고 죽음도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20만자로 늘릴 수 있는 내용을 단 몇 줄로 요약해 보았다. 어떤가? 운 좋게 과거로 돌아와서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생겼으니 좋지 아니한가! 이것이 바로 요즘 대세 중 하나인 회귀물의 패턴이다.
나는 취미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웹소설 연재 플랫폼 직원이다. 로맨스를 탐독하는 독자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가는 플랫폼에서 ‘회귀물’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일반 판타지 소설에서 루프(roof), 즉 회귀 소재가 툭 튀어나오더니, 어느덧 로맨스판타지로 옮겨가 ‘대세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등장 당시에는 독특한 소재였지만 지금은 굉장히 흔한 클리셰가 된 회귀물. 도대체 무엇이 이 코드를 이렇게까지 키웠을까? 유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지금부터 무척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회귀물’을 바라보고자 한다.
1. 대세 코드, 어디까지 봤니?
요즘 뜨거운 로판(로맨스판타지의 약칭) 필드에서 흥행보증수표 자리 잡은 회귀물. 사실 등장은 생각보다 훨씬 전에 다른 필드에서 먼저 했다. ‘역행물’이나 ‘리셋물’ 등으로 소소하게 불리며, 대대적으로 유행을 타지 않았을 뿐이지. 덕분에 퓨전 판타지에서도 그 예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 판타지 1세대 이수영 작가가 비교적 최근에 내놓은 판타지 소설 <리로드>나 더페이서 작가의 퓨전 소설 <두 번 사는 플레이어>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 ‘회귀’코드가 로맨스판타지로 옮겨 가면서, 작은 불씨는 순식간에 산불이 되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보통 여자 주인공이 후회와 억울함 속에 생을 마감한 후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며 시작된다. 인기의 중심에는 정유나 작가의 <버림 받은 황비>도 있었다. 폐비 되어 처형당한 황비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며 펼쳐지는 길고 긴 이야기는 전형적인 회귀물의 특징을 가진다. 회귀의 이유 역시 앞에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니 설득력도 어느 정도 있다.
사실 [회귀물] 키워드를 단 작품은 e북보다는 연재 플랫폼에서 범람하는 추세다. 지금 J모 연재 사이트를 열어 작품 리스트를 보라. 키워드가 [회귀]나 [빙의]인 것들이 많을 것이다. 입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펴는 회귀 코드를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죽음과 인생 리셋, 그리고 재도전.’
프롤로그에서 나를 버렸던 개자식이 갑자기 친근하게 접근한다거나, 잘못을 바로잡으며 살다 보니 남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온다거나, 전생에서 맺어지지 못했던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이어진다거나. (물론 후자는 적다.) 자잘한 요소들은 달라도 뼈대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나머지는 여기서 더하고 뺄 뿐이다. 즉, 회귀물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두 편만 보고 나면 패턴이 다 파악될 정도로 간단하다는 점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소재에 엇비슷한 맥락을 따라가는 회귀 소설들. 계속 보다보면 물릴 법도 한데, 어째서 아직 인기가 많은 걸까. 왜 하필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흔한 소재가 인기인 이유는 단순하다. 흔해서다. 나는 회귀물에서 ‘리셋 증후군’을 보았다.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것처럼 현실도 리셋이 가능할 것이라 착각하는 현상이다. 물론 회귀 코드에서는 ‘착각’이 아닌 ‘희망사항’에 가깝지만, 결국 뿌리는 같다.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다.
우리는 때때로 선택을 후회하곤 한다. “아, 그때 이렇게 할 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이렇게는 안 할 거야.” 평소에도 심심찮게 내뱉는 말들이 아닌가. 조금 더 가 보자면, “지금 이 지능으로 초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도 있다. 회귀물은 이 심리를 교묘하게 충족시켜 준다.
언뜻 보면 리게임(Re game)과 비슷한 맥락이다. 게임에서도 소위 ‘망캐(스탯을 잘못 찍어 망한 캐릭터)’가 되면 스탯을 리셋하거나 아이디를 새로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FPS의 리스폰이나 RPG의 부활 시스템 등은 현실에서는 결코 적용되지 않으니,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달콤한 상상에 탐닉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한 번쯤 품는 생각을 정확히 찌른 소재가 회귀물이다. 그래서 통한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잘못을 만회하며 행복한 두 번째 인생을 맞이하는 로망이 소설에서는 이루어지니, 대리만족 톡톡히 시켜준다고 볼 수 있겠다.
3. 나는 소화할 수 없었던 만찬
회귀물은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 모두가 억울한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겠지만 일단은 눈에 보이는 주인공만 회귀하니까.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이, 그냥 억울하던 차에 우연히 시간을 거스르는 작품들도 허다하다. 소원을 들어주는 ‘신’ 같은 존재는 나오지 않고, 그냥 ‘어쩌다’ 돌아간다.
그 이후는? 답습이 있을 뿐이다. 전생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위험한 것은 살짝 피해버리면 인생 쉽게 살기가 완성된다. 꼭 앞날을 예측하는 예언자가 된 기분으로 역경을 척척 피해갈 수 있다. 이런 점이 주인공에게 이입해서 읽는 독자들에게는 무척 달콤하게 작용한다. 기억을 가지고 반쯤 무적이 되는 주인공은 팍팍한 현실에 청량감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이 이쪽과 거리가 멀었던 나는 회귀물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일단 우위를 점한 패턴, ‘주인공이 전생에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에게 다시 끌리는 것’을 두고 보기가 정말 힘들었다. 후회남은 그대로 열심히 후회만 하며 뉘우치고 살아야 하며, 똑같은 개자식은 죽어도 다시 만나기 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귀 후에도 같은 놈에게 끌리는 여자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가 없었다. 여자 주인공만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탓에 나머지 인물들이 약간씩 ‘바보’가 되는 설정에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도 크다. 물론 취향이 확고한 한 사람의 독자로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며 재밌게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허구를 탐닉하는 이유는 결국 잠깐 현실에서 멀어질 시간이 필요해서니까.
하지만 작가로서는 이 추세가 걱정되기도 한다. 회귀라는 코드는 때때로 ‘부족한 개연성과 판타지 요소에 대한 핑계’ 정도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로맨스 판타지가 중세 유럽의 세계관 속에서 귀족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이점 때문에 ‘이게 판타지냐?’는 논란에 종종 휩싸이곤 한다. 골수 판타지 독자들이 ‘로판’과 판타지를 분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일단 회귀했어요. 빙의했어요. 차원을 넘어왔어요.’ 정도만 달아주면 부족한 판타지 요소는 어느 정도 충족된다.
‘개연성’도 마찬가지. 회귀물은 전개의 구멍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인 코드다. 일단 설명이 편하다. 회귀물이니까, 주인공은 원래 다 알고 있으니까, 라고 해두면 된다. 작가가 특별한 장치를 하지 않아도 ‘주인공이 이미 다 알고 있어서’라는 설명을 붙여 두면 모든 이야기에 설득력이 생긴다. 치밀하게 스토리를 엮지 않아도, 플롯이 아닌 ‘소재’를 통해서 설득이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설명하기 쉽고,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논리다.
4. 대세를 꿈꾸는 작가들에게
회귀물은 지금 세태에서는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소재다. 누구나 꿈꾸었던 것들이 잔뜩 들어 있으니까. 사람의 욕망을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트렌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나 소재가 난립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요즘에는 꼭 필요해서 회귀 설정을 넣는다기 보다는 써먹기 쉽고 인기가 있어서 회귀물을 쓰는 작가들이 눈에 띄게 들었다. ‘인기 끌고 싶으면 첫 소설은 무조건 회귀물로 쓰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대충 설명이 될까?
찍어낸 것 같은 줄거리에 고정 클리셰 몇 개 섞으면 뚝딱 완성되는 마법 상자 같은 소재. 대세 코드만 있다면 작품성이 없어도 인기를 끈다는 인식. 개연성과 설득력을 스토리텔링이 아닌 소재 자체에 두려는 시도…. 창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장점 뒤에는 이런 치명적인 단점들도 존재한다. 이 단점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장르나 소재의 다양성이 붕괴될 수도 있다. 고정 클리셰에 등장인물 구도와 에피소드만 바꿔 끼운 것 같은작품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갓 부상하기 시작한 ‘로판’의 방향성이 심히 걱정된다.
처음 등장했을 당시만 해도 회귀물은 독특하고 신선한, 달콤한 별미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게 마련이다. ‘진부한 회귀물을 그만 보고 싶다’, ‘회귀물이지만 작품성이 좋아서 본다’는 외침이 그 증거다. 그러니까 로맨스와 로맨스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작가님’들에게 말하고 싶다.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쓰니까 쓰자, 인기 있을 것 같으니까 쓰자. 이런 생각으로 본질을 잊은 채 ‘회귀물’에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장르소설이란 녀석은 입이 짧으니, 오래오래 먹여 살리려면 ‘다양한 반찬’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