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아) 나에게 무협지와 판타지를 대변하는 장르소설에 대한 기억은 담배 연기 자욱한 만화방에서 시작한다. 낡은 가죽 소파에 푹 파묻혀 성인만화를 읽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쭈뼛쭈뼛 눈치보며 무협지를 읽던 나에게 드디어 한국형 판타지, 그 유명한 ‘퇴마록’이 등장했다. 더 이상 담배 냄새 안 나는 쾌적한 우리집 내 방에서 좋아하는 장르소설을 보던 감동이란. 전화요금 때문에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은 것도 여러 번이지만 그 짜릿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였을까. 간간히 한문이 섞여 나오던 중국의 무협세계관과 야설의 중간 그 어디쯤에 있던 소설을 던지고, 일반인을 초월하는 능력에 대한 동경 그리고 기존의 무협 설정 등을 갖고 있지만 유교적 캐릭터가 아닌 어쩌면 나와 비슷한 현대적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이 되어 마침내 나는 내 장르소설 취미의 즐거움을 직업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업무 시간에 당당하게 장르소설을, 그것도 유료소설을 공짜로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이들이 모여있는 곳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PC 통신시대를 거쳐 장르소설이 인터넷소설로 모두 흡수되고, 현재 웹소설 형태로 연재되고 있는 지금, 웹소설 연재 플랫폼에 입사한 나는 동료들과 최신 작품에 대해서 논하고 나 또한 업무상 어느 때보다 많은 웹소설을 읽게 되면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죽음, 특히 자살을 통해 이계(異界)로 넘어가 다른 생을 사는 소재가 많다는 것, 10대 주인공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것, 그리고 작가들이 맞춤법이나 문장의 오류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아마도 출판사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웹에 바로 작품을 연재할 수 있으니 현실의 모순이나 부조리가 더 빨리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고, 스트레스 분출의 통로가 많지 않은 고등학생 층에게 웹소설이 배설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에 고교생 작가와 독자가 늘면서 작품 속 등장인물의 나이도 매우 어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꼬맹이 시절 읽었던 장르소설과 현재의 웹소설은 어떤 부분들이 달라진 걸까. 초등학생 때부터 읽어온 나의 장르소설 독서경험을 바탕으로 장르소설의 변천사를 짚어보려고 한다.
시공간적 배경의 한계가 사라지다 – 무림 사회에서 이계 판타지까지
장르소설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PC 통신의 발전과 함께 작품의 독자층이 오타쿠에서 일반 대중으로 넓어지면서부터다. 80년대에는 중국 무협 번역서가 장르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90년대 접어들자 중국형 판타지를 탈피한 한국형 무협 즉 신무협의 세계가 열리고, 금강, 용대운, 좌백 등 유명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독자들이 평면적인 캐릭터와 비슷한 전개 구조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작가들의 연령이 어려지면서 무협과 서양 판타지가 조합된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이때 등장한 작품이 장르소설의 레전드라 불리는 전동조 작가의 ‘묵향’ 이다.
무의 궁극을 추구했던 살수 출신의 주인공이 배신당하고 다른 차원으로 소환을 당하면서 겪는 이야기로, 동양 판타지의 주인공이 서양 판타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며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상상력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5년 4월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14개 대학 도서대출 횟수를 종합한 순위에서 ‘묵향’ 이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니 가히 센세이션이라 불릴만했다.
묵향을 필두로 꽉 짜인 무림 사회의 배경은 탄력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문파가 숭상하는 가치에 따라 정파, 사파, 마교 등으로 나뉘고 다시 소림파, 무당파, 하오문, 일월신교 등으로 구분되는 무림에서 동양과 서양,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며 시공간의 배경이 무한히 넓어진 것이다.
웹소설 최초로 조회수 5천만회를 돌파한 ‘나는 귀족이다’의 경우 게임판타지 장르로 괴수를 물리치는 게임 세계의 설정과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 이슈 등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조아라 제1회 77 페스티벌 1위작 ‘트롤러’의 경우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가던 대학생이 휴대폰을 열어보다가 정신을 잃고 이계에 떨어져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야기로, 역시 게임과 현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는 기성 문단에 비해 유난히 젊은 작가층이 많은 웹소설의 특징에서도 기인한다. 2014년 조아라 작가의 평균 연령을 산출 했을 때 27.4살, 그중 10대와 20대의 비율은 전체의 74%를 차지했다.
100% 착한 놈은 그만! 선과 악 사이의 현실적 캐릭터 등장
중국 번역서로 시작된 동양의 판타지에는 늘 극명히 대비되는 두 주인공이 있다. 한쪽은 항상 선하고 강하고 뛰어난 영웅이고, 반대편의 인물은 강하고 능력 있지만 항상 악하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흥미로운 점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디쯤 현실에서 볼 법한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오만하고 독단적이며 돈과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전히 지구를 구하는 ‘아이언맨’이 마블코믹스의 수많은 영웅들 중 가장 인기를 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아라에서 연재중인 로유진 작가의 작품 ‘메모라이즈’ 속 주인공은 군대 제대를 막 마친 20대 초반의 흔한 예비군이 이계로 소환당해 여러 동료들을 만나 고난을 헤쳐나가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남희성 작가의 ‘달빛조각사’에도 어려운 환경에 처하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소년 가장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더 이상 클리쉐한 권선징악 스토리는 그만, 바야흐로 양면성 혹은 다양성을 지닌 현실적인 캐릭터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권선징악 구조 역시 클리쉐한 방식에서 현대적으로 변모했다. 전통 무협물에서는 가족이나 스승의 죽음을 막고 복수하기 위해 무공을 쌓지만, 결국 원수를 용서하거나 원수가 천벌을 받아 허무하게 죽는 식으로 서사가 흐른다면, 최근의 웹소설에서는 개인의 분노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아내고 주인공이 사회구조 자체를 변혁하는 방식으로 악(문제)을 해결한다.
앞서 말한 ‘나는 귀족이다’의 경우 별 볼일 없던 하급 초능력자였던 주인공이 유일무이한 최상위 초능력자로 각성하면서, 상위 초능력자가 괴수 레이드의 분배금을 대부분 가져가던 구조에서 모든 등급의 초능력자가 1/N로 나눠갖는 구조로, 계급사회 자체를 재편한다. 또 벤처 기업을 도와 대기업의 횡포를 막는다던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핍박하는 국제관계에서 전세계 유일무이한 초능력을 바탕으로 강대국과 베팅을 하는 등 훨씬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나간다.
변화하고 있는 장르문학
장르문학은 순수문학보다 보다 직접적이고 빠르게 세대를 반영하며 변화하고 있다. 굵은 서사가 있는 장르문학이 한편 읽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웹소설 연재 형태로 변모하면서 내용이 한층 가벼워졌다는 비판을 받고, 과한 폭력성이나 선정성으로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우려도 있지만, 여전히 웹소설을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나는 이야기가 주는 긍정적 영향이 훨씬 더 크다고 믿는다. 주인공이 원하는 이상향을 위해 방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해나갈 때 짜릿하기 그지없는 통쾌함을 느끼고, 나 역시 주인공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노력하리라 작은 다짐을 하며 웹소설이 나를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담배빵이 있는 소파에 기대어 작품을 읽지 않고, 출퇴근 시간과 자기 전에 모바일과 태블릿으로 작품을 즐기고 있지만, 영웅과 판타지 세계에 대한 동경은 그대로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