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넷코리아=봉성창 기자) 중세시대 땅을 많이 가진 한 영주가 있었다. 그는 모든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차별없이 땅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또한 그곳에서 수확하는 농작물을 돈으로 바꿀 수 있도록 대규모 시장까지 열었다. 판매된 수익의 30%는 세금으로 거둬들이지만, 옆도시에 비하면 충분히 감내할만한 고마운 세율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더욱 농사가 잘 될 수 있도록 보다 효율적인 농사법과 농기구 개발을 앞장서서 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개발자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전수해준다. 부지런하고 실력 있는 농부들은 이를 이용해 이미 남부럽지 않게 많은 돈을 벌었다. 이것이 바로 지난 26년간 WWDC를 통해 애플이 그동안 구축해 온 개발자 생태계의 모습이다.
애플은 8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 센터에서 개최한 WWDC 2015에서도 전 세계 개발자들에게 선물 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었다. 지금까지 애플 앱스토어를 통해 다운로드 된 애플리케이션의 숫자는 1천억건을 넘어섰으며, 개발자들에게 지불한 돈만 해도 무려 300억달러(한화 약 33조6천7백억원)에 달한다.
올해 WWDC는 애플의 각종 운영체제의 업데이트를 중심으로 개발자들에게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그 어느 해보다 별다른 이슈가 없는 행사이기도 했다. 새로운 하드웨어가 발표된 것도 아니면서 소비자에게 당장 체감되는 변화도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애플은 진보한 운영체제를 앞세워 제품 경쟁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맥OS를 시작으로 IOS에 이어 제 3의 OS인 워치OS를 선보임으로써 애플 워치 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아울러 비츠 인수한 후 1년 만에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애플 뮤직’을 공개하면서, 발표 자체를 아예 지미 아이오빈 비츠 공동설립자에게 맡겨버렸다. WWDC 2015에서 발표 된 내용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분석했다.
성능 중시한 OSX 엘 캐피탄…맥OS-iOS 융합 가속화
OSX 10.11의 코드네임은 샌프란시스코 명소 이름 중 선택하는 법칙에 따라 ‘엘 캐피탄’으로 정해졌다. ‘엘 캐피탄’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인근의 돌로 된 900m 암벽의 이름이다. 당초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 이름이고,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엘 캐피탄’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기존 맥 사용자들이 몇몇 앱으로 편리하게 사용하던 것들을 기본적으로 제공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예를 들어 화면을 간편하게 분할해서 사용하는 창 관리(Windows management) 기능이 대표적이다. 자체 탑재되는 기능인데다가 애플이 직접 만들었으니 써드파티 앱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직관적이다. 또한 모든 면에서 스와이프 기능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스팟라이트는 마치 자연어 검색을 연상시키듯 정교하게 많은 정보를 검색하고 보여준다.
지난해 WWDC에서 발표한 그래픽 렌더링 엔진 메탈을 맥에서도 지원하게 된 점도 상당히 흥미롭다. 애당초 메탈은 게임을 겨냥해 만들어진 API다. 애플은 맥 혹은 맥북 계열 제품 중에서 그 어떤 제품도 ‘게임을 해보세요’라는 메시지로 마케팅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외장 그래픽카드가 달려있는 모델 역시 15인치 맥북 일부 모델과 맥 프로 밖에 없다.
그럼에도 애플은 에픽게임즈를 초청해 게임 데모를 시연하면서까지 맥OS에 메탈을 도입한 결과 성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강조한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론 어도비를 통해 포토샵 등 각종 애플리케이션의 성능이 크게 향상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이러다가 애플이 머지않아 게이밍 맥북을 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능동적 비서로 승진한 시리…스위프트 개방은 신의 한수?
iOS9의 핵심은 개인화다. 음성비서 서비스 시리는 좀 더 똑똑해졌으며 주인에 대해 더욱 잘 알게됐다. 또한 위키피디아, 에어비앤비와 같은 외부 정보를 좀 더 적극적으로 가져와서 보여준다. 가령 스케줄 관리나 알람 설정 등 비서 업무를 꽤나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필요하면 시간이나 장소 등과 같은 정보까지도 함께 활용한다.
이를 두고 애플은 그동안 시리가 그냥 비서(Assistant)였다면 이제는 능동적인 비서(Proactive Assistant)라고 설명했다. 한발 앞서 구글도 이와 유사한 ‘구글 나우 온 탭’을 발표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만큼 누가 누구를 베꼈다기 보다는, 일종의 트렌드다.
일부 사용자들은 여전히 잘 쓰지도 않는 시리를 각 기업들이 앞다투어 개발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그것은 입력 인터페이스의 진화 양상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현재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통해 터치 인터페이스를 자유자재로 다루지만, 초창기 터치 인터페이스는 느린 반응속도와 정밀도로 인해 지금 음성 입력 이상으로 사용하기 불편했다. 애플, 구글 모두 차세대 미래 인터페이스는 토니 스타크가 자비스 부리듯 ‘음성 인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확고해 보인다.
노트 앱 역시 훨씬 강력해져 이제 단순 메모장으로 부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특히 필기 인식을 한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던 필기 인식 기능이 이제서야 제공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플은 과거 4인치 작은 화면에서 터치펜이나 손가락으로 필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미리 테스트하고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못 넣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안 넣는다. 애플은 원래 그런 기업이다.
아이패드에 적용되는 iOS9의 변화도 주목할만하다. 우선 퀵타이프가 더욱 개선돼 키보드 영역을 맥북의 트랙패드 처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마음대로 화면 분할을 통해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동영상의 경우 PIP(Picture In Picture)를 지원한다. 멀티태스킹에 인색한 애플의 취향을 감안하면 이만저만 선심을 쓴것이 아니다. 이같은 변화는 단 한마디로 요약된다. 생산성 강화다. 동시에 차근차근 포스트 PC 입지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밖에 애플페이 적용 업소가 좀 더 많아지고, 영국에서도 쓸 수 있게 됐다. 애플 맵도 대중교통 환승 정보 제공 등 약간 업그레이드 됐다. 헬스킷, 홈킷 등 수많은 개발자 키트가 동시에 공개됐다. 카플레이는 무선 미러링이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애플은 지난해 공개한 새로운 개발언어 ‘스위프트’를 ‘스위프트2’로 업그레이드 하면서 오픈소스로 풀어버렸다. 이 말 뜻은 스위프트에 대한 베타적 권리 주장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많은 개발자들이 누구나 마음껏 사용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어 고쳐나가는 것이 애플이 얻을 이익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큰 환호와 박수는 이 때 터져나왔다.
깜짝 놀라지 못해 더욱 아쉬운 ‘애플 뮤직’
WWDC 2015에서 ‘워치OS’라는 이름과 함께 부여된 버전은 2.0이다. 즉 애플 워치 초기 탑재된 OS는 워치OS 1.0으로 1.0이라는 이야기다. 갈고 닦을수록 완벽해지는 운영체제의 특성상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새로운 기능들이 대거 추가됐다. 가령 시계 화면을 타임랩스 동영상이나 자신이 가진 사진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있다. 아직 애플 워치를 써보지 못한 입장에서 “이게 원래 안됐던 거야?”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업데이트 내용이 많았다. 물론 시계 충전시 화면을 가로로 보여주는 기능 등 톡톡튀는 기능도 없지는 않다.
워치OS 발표가 끝나고 팀 쿡 CEO가 다시 무대에 올라와 “이 말을 하게 돼서 기쁘다”며 애플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원 모어 씽(One more thing)을 외쳤다. 역대 최고로 예상하기 쉬웠던 ‘원 모어 씽’이라는 점만 빼면 모든 것이 좋았다. 행사 하루 전날 더그 모리스 소니뮤직 CEO가 이 내용을 미리 발설해버렸기 때문이다.
신선함은 다소 떨어졌지만 애플 뮤직은 월 9.99달러를 내면 한달간 마음껏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다. 초기 3개월은 무료고, 14.99달러를 내면 6인 가족권을 구매할 수도 있다. 24시간 일주일 내내 끊임없이 제공되는 라디오 DJ 서비스 ‘비츠 원’도 들을 수 있고, 뮤지션이 직접 팬들과 소통하는 ‘커넥트’ 기능도 함께 제공된다.
26년 전통 세계 최대 개발자 행사…애플 경쟁력의 진앙지
WWDC2015는 언제나 그렇듯 애플 특유의 색깔이 잘 묻어난 행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OS 중심으로 풀어낸 올해 키노트는 개발자들에게 충분한 흥분을 안겨줬으며,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기억에 남는 한방은 없었지만 먹을 것은 많았다.
크레이그 페더러기 부사장의 유머 감각이나, 애플 다운 발표 진행 및 무대 구성, 참석한 개발자들의 열기 등 모든면에서 예년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덜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통 WWDC에 발표된 대부분은 당장 개발자용 베타 버전이 공개되며, 그 이후 가을 즈음 일반 소비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용자 입장에서는 가을이 되더라도 그리 체감되는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맥OS나 애플워치의 경우 비교적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iOS9이다.
iOS9의 새로운 기능 대부분이 미국 사용자들에게만 적용되며, 연동 기능 역시 미국 사용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애플이 우리나라 콘텐츠 사업자와 별도로 계약을 맺지 않는 한 시리를 통한 확장 검색 기능은 빈약할 수 밖에 없다. 애플 지도가 대중교통 환승 정보를 안내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훌륭한 써드파티 앱을 사용하고 있다. 9.99달러로 책정된 애플 뮤직은 다른 미국 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멜론, 벅스, 지니, 네이버뮤직 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진다. 애플 페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물론 애플이 한국어 시리를 지원하는 만큼, 시리 관련된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튠즈 조차 아직 들어오지 않은 마당에 애플의 콘텐츠 서비스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빠르다. 애플 페이 역시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언젠가 아이폰으로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시간이 좀 필요한 문제다.
요즘 애플이 꽤 바빠진 모양새다. 기존에 잘하던 것 이외에도 웨어러블, 음악, 자동차, IOT 등 발을 안 걸친 분야가 없다. 올해 WWDC에서는 이 모든 것을 잠깐씩 거론하는데만 무려 2시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애플이 한다고 하면 묘하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성공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애플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애플이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이를 치고 들어와서 한 몫 단단히 챙겨갈 개발자들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0년부터 26년간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WWDC가 열린 이유다.
